◆ 원씨발상지(元氏發祥地) 원씨현(元氏縣) |
주(周)나라 중원 하북성 남쪽땅에 원씨가 살았다. 일부학자는 고조선땅을 거쳐 고구려땅 이었다고도 한다. 수천년전부터 원씨(元氏) 부족국가 가 있었다. 현 중국 하북성 석가장시 30KM 아래쪽, 그 중심마을 이름은 원씨현(元氏縣)이있다. 성터 또는 옛터를 뜻하니 원씨의 옛도시라는 말이다. 원씨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아주오래 전부터 이곳에 살아왔을 것으로 말한다. 원씨발상지(元氏發祥地) 인 것이다.
위안스 현
◆원씨(元氏) 출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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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천년전
3천년전, 최초로 상나라 문헌에 있는 명신인 태사원선(太史元銑) 이 있었다.
→ BC635년(2,660년전), 주(周)나라 제후국인 위(衛)나라 21대,23대 위성공왕(BC.635년) 때 원훤[元喧] 은 대부와 재상 이 있다. 위(衛)성공왕은 외교실패로 국가 존망에 위기에서 원훤은 주나라 양왕 20년(기원전632년)때에 진(晉)나라 문공(文公)에게 위(衛)나라가 패배하여 위성공왕이 주나라에 유배되었다. 원훤대부는 주나라와 진(晉)나라 문공(文公)에게 외교적으로 위성공왕을 복위시키고 다시 나라를 구하였다. 백성들에게 원훤의 명성이 올라가자 위성왕은 자신의 외교실패를 모면하기 위해 원훤을 모함하고, 아들 원각을 죽이었다. 재상인 원훤 마져 죽이고자 하여 원훤(元喧)은 패자(霸者)인 진(晉)나라로 망명하였다고한다. 이후 원훤의 후손들의 이동과 흔적을 찾기어렵다.
춘추전국시대에 진(晉)나라는 조(趙)나라,위(魏)나라,한(韓)나라 로 쪼개졌다.
◆서기 386년~534년 선비족 북위황제(北魏皇帝) 원씨(元氏) |
중국북방지역은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구성된 기원전 3세기~기원후 1세기 까지 수백년동안 동북아시아 지역에 유목민집단이 세운국가 흉노(匈奴) 가 있다. 흉노는 진나라 한나라보다 먼저 철기문화에 진입했다. 유사한 청동거울과 말부장품등이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되었다. 청동기 문화는 만주,고구려,신라를 비롯한 한반도와 멀리 일본까지 영향을 미쳤다. 유사한 청동거울과 말부장품등이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되었다. 신라인들이 흉노인 김일제후손이라는 말이 있다. 또한 신라왕족설 있다.
전국시대부터 진.한시대 삼국시대(위.촉.오) 이후 위진남북조시대에 중국화북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흉노족이 멸망한후 자립한 선비족의 차지하였다. 위진남북조시대에 남하하여 한족들 를 정복하고, 서기 386년 북위(효문제:원굉)를 세웠다. 서기 439년 북위는 중국중원을 포함하여 화북을 통일하여 5호16국시대를 종식시키고 남북조시대를 열었다. 북위는 고구려 신라 백제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졌으며 역사적으로 좋은 관계를 가졌으며 많은 교류가 있었다.
◆황제 원씨 (皇帝元氏) |
서기 471년 중국 중원을 차지하고 즉위한 북위 7대황제 효문제(휘.元宏) 는 탁발성씨를 원씨(元氏)로 바꾸어 원씨황제국가(元氏皇帝國家)가 시작 되었다. 효문제(孝文帝)는 수도를 낙양으로 천도하고 한화정책을 시행하였다.
→ 7대 황제 효문제 원굉(元宏)
출생 : 467년 10월 13일/북위 대군 평성 황궁 자궁(現 산시성 다퉁시)
즉위 : 471년 9월 20일/북위 대군 평성 황궁(現 산시성 다퉁시)
사망 : 499년 4월 26일 (향년 32세)/ 북위 하남군 낙양 곡당원 행궁(現 허난성 뤄양시:현,낙양)
능묘 : 장릉(長陵
효문제(467~499.)는 중국 북위(北魏 : 7대 황제(재위 471~499년), 이름은 탁발굉(拓跋宏)이다. 효문제는 선비족(鮮卑族)으로 성을 원(元)이라 고치고 이름을 원굉(元宏)이라 했다. 현조 헌문제(顯祖獻文帝)의 아들로서 471년 5살에 즉위해 년호를 연흥(延興)으로 고쳤다. 효문제는 490년까지 조모인 풍태후(馮太后)의 섭정하에 있었다. 3살에 모친을 읽은 효문제는 풍태후 슬하에서 자랐다. 풍태후는 효문제에 대한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고 한족 토인(土人)을 전문 배치해 그에게 유가경전을 가르쳤다. 묘호는 고조(高祖)이다.
부족민의 한화정책를 장려해 북위를 왕조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토지개혁을 단행해 중국 토지제도의 기초를 마련했다.
471년 제위에 올라 원(元)이라는 성을 사용하고, 수도를 후한(後漢 : 25~220)의 수도였던 낙양[洛陽]으로 옮겼다.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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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정비) : 폐황후 풍씨 풍청(廢皇后 馮氏 馮淸)
황후(계비) : 유황후 풍씨 풍윤(幽皇后 馮氏 馮潤, 469년 ~ 499년) - 폐황후 풍씨의 동생
황후(추존) : 문소황후 고씨 고조용(文昭皇后 高氏 高照容, 469년 ~ 497년)
제2황자 : 황태자 원각(元恪) - (선무제)
제5황자 : 광평문목왕 원회(廣平文穆王 元懷, 488년 ~ 517년) - (무목제)
황손 : 평양왕 원수(平陽王 元修) - (효무제)
황녀 : 장락공주(長樂公主, 489년 ~ 525년)
황후(폐서인) : 폐 정황후 임씨(廢 貞皇后 林氏, ? ~ 483년) : 자귀모사제도로 사망
제1황자 : 폐태자 원순(廢太子 元恂, 483년 ~ 497년)
후궁 : 소의 풍씨 풍산(昭儀 馮氏 馮姍) - 폐황후 풍씨 동생
후궁 : 귀인 원씨(貴人 袁氏)
제3황자 : 임조왕 원유(臨洮王 元愉, ? ~ 508년) - (서위 문경제)
후궁 : 부인 나씨(夫人 羅氏, ? ~ 514년)
제4황자 : 청하문헌왕 원역(清河文獻王 元懌, 487년 ~ 520년) - (동위 문헌제)
제6황자 : 여남문선왕 원열(汝南文宣王 元悅, 494년~ 532년)
후궁 : 부인 이씨(夫人 李氏)
후궁 : 빈 조씨(嬪 趙氏)
황녀 : 의양공주(義陽公主)
후궁 : 대빈 정씨(大嬪 鄭氏)
후궁 : 소빈 정씨(小嬪 鄭氏)
제7황자 : 은왕 원조(隱王 元恌, 494년 ~ 500년)
후궁 : 빈 왕씨(嬪 王氏)
후궁 : 대빈 최씨(大嬪 崔氏)
후궁 : 소빈 최씨(小嬪 崔氏)
후궁 : 빈 위씨(嬪 韋氏)
후궁 : 빈 노씨(嬪 盧氏)생모 미상
황녀 : 난릉공주(蘭陵公主)
황녀 : 회양공주(淮陽公主)
황녀 : 화양공주(華陽公主)
황녀 : 서하공주(西河公主)
황녀 : 순양공주(順陽公主)
황녀 : 시평공주(始平公主)
황녀 : 제남공주(濟南公主)
황녀 : 의양공주(義陽公主)
황녀 : 고평공주(高平公主)
황녀 : 남양공주(南陽公主)
→ 8대 황제 선무제 원각(元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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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499년 5월 7일 ~ 515년 2월 12일
즉위식 태화(太和) 23년 4월 12일(499년 5월 7일)
전임 효문제(孝文帝)
후임효명제(孝明帝)
능묘 : 낙양 경릉(景陵)
묘호 : 세종(世宗)
<신상정보>
출생일 태화(太和) 7년 윤 4월 5일(483년 5월 27일)
사망일 연창(延昌) 4년 1월 13일(515년 2월 12일) (31세)
부친 효문제(孝文帝) 원굉(元宏)
모친 문소황후(文昭皇后) 고조용(高照容)
배우자 순황후(順皇后) 우씨(于氏)
황후(皇后) 고영(高英)
영황후(靈皇后) 호씨(胡氏)
<생애>
황태자였던 맏형 원순(元恂)은 아버지 효문제가 추진하는 한화 정책에 반대해 반란을 모의했다가 폐위되어 죽었기 때문에 동생인 원각이 대신 황태자가 되었다. 499년 효문제가 세상을 떠나자 17세로 즉위했다. 초기에는 종실인 숙부 함양왕 원희(咸陽王 元禧), 상서령 왕숙 등의 보좌를 받았다.
재위중, 양나라를 공격해 사천지방으로 영토를 확대해, 북방에서는 유연에 대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불교 신자였고 점차 불교 신앙에 빠졌다. 501년, 국정을 측근이나 외척인 고조에게 맡겨 친정을 시작했으며 이윽고 황족들을 멀리했다. 508년 고조의 진언으로 황족의 어른인 숙부 원희와 그 막내 아우인 팽성왕 원협, 이복동생인 경조왕 원유 등 많은 황족들을 죽였다. 그리고 왕숙에 대해서도 자살을 명령했다.
<가계도>
황후(정비) : 순황후 우씨(順皇后 于氏) (488~507)
제 1황자 : 왕자 원창(元昌) (506~508)
황후(계비) : 숭헌황후 고씨 고영(崇憲皇后 高氏 高英) (~518)
황녀 : 건덕공주(建德公主)
황후(추존) : 영황후 호씨 (?~528)
제 3황자 : 태자 원후(元詡) (510~528) - (북위 효명제)
후궁 : 귀빈 사마씨 사마현자(貴嬪 司馬氏 司馬顯姿) (491~521)
후궁 : 귀화 왕씨 왕보현(貴華 王氏 王普賢) (487~513)
후궁 : 빈 이씨(嬪 李氏)
생모미상
황녀 : 태원공주(太原公主)
황녀 : 양평공주(陽平公主)
서기 524년 한화정책에 대한 일부 선비족의 불만은 6진의 난을 초래하여 북위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서기528년 6진의 난을 진압과정에서 흉노 이주영이 군대를 이끌고 낙양에 들어와 새로운 효장제 황제를 옹립하고 영태후와 후계자를 황허강에 던져버리고, 승상이하 대신1,000명을 처형했다. 이시기에 많은 원씨황제손들이 사망하였다.
원씨황제는 14대 효무황제 [휘.원수(元脩)]까지 이어졌으며 하음의 변으로 동위와 서위로 나뉘고, 원씨 황제국가는 이주씨와 고씨(高氏)에게 패망하여 북제,북주 로 바뀌었다. 하음의 변으로 살아 남은 원씨 황제손들은 고구려,백제,신라를 통하여 한반도로 역사적 시기적으로 볼 때 한반도로 이동한 흔적의 역사기록이 많다. 그 흔적으로 한반도에 원주원씨(原州元氏) 가 있으며 중국의 하남원씨(河南元氏)가 있다. 근거로 중국정사조선전 북사열전에 고구려 백제 와 자주 사신왕래한 역사 와 표(表)를 올린 문헌이 다수 있다.서기552년 북제 (천보3년) 고구려 24대 양원왕때 북위(北魏) 말(末)에 고구려로 흘러들어간 백성들 송환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최.유는 5천호(戶)를 돌려받아 복명(復命)하였다고 역사기록이 있다. 따라서 많은 유민과 황족들이 고구려로 이동하였다는 것을 추정 할수 있다. 고구려로 피신한 원씨황족 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국경에서 멀리 산맥을 따라 산골짜기 또는 멀리 이동하여 거주하며 이름과 신분을 숨기고 서민화 하여 숨어 살아야 했을 것이다. 중국 중원 과 북방에 남아있는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되는 비파형 동검문화 유물들의 흔적은 북위와 한반도와 연관성을 보여준다.
< 북위(원위)황제 와 연호 >
대수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 |
- |
헌명황제 |
탁발식(拓跋寔) |
- |
제1대 |
위 태조 |
도무황제 |
탁발규(拓跋珪) |
등국(登國)386년~396년 |
제2대 |
위 태종 |
명원황제 |
탁발사(拓跋嗣) |
영흥(永興)409년~413년 |
제3대 |
위 세조 |
태무황제 |
탁발도(拓跋燾) |
시광(始光)424년~428년 |
제4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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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탁발여(拓跋余) |
승평(承平)452년 |
- |
위 공종 |
경목황제 |
탁발황(拓跋晃) |
- |
제5대 |
위 고종 |
문성황제 |
탁발준(拓跋浚) |
흥안(興安)452년~454년 |
제6대 |
위 현조 |
헌문황제 |
탁발홍(拓跋弘) |
천안(天安)466년~467년 |
제7대 |
위 고조 |
효문황제 |
원굉(元宏) |
연흥(延興)471년~476년 |
제8대 |
위 세종 |
선무황제 |
원각(元恪) |
경명(景明)500년~504년 |
제9대 |
위 숙종 |
효명황제 |
원후(元詡) |
희평(熙平)516년~518년 |
임시 |
- |
- |
효명제의 딸(孝明皇帝女) |
- |
임시 |
- |
유주 |
원조(元釗) |
- |
- |
위 숙조 |
문목황제 |
원협(元勰) |
- |
- |
- |
효선황제 |
원소(元劭) |
- |
제10대 |
위 경종 |
효장황제 |
원자유(元子攸) |
건의(建義)528년 |
제11대 |
- |
- |
원엽(元曄) |
건명(建明)530년~531년 |
- |
- |
선황제 |
원우(元羽) |
- |
제12대 |
- |
절민황제 |
원공(元恭) |
보태(普泰)531년~532년 |
제13대 |
- |
폐황제 |
원랑(元朗) |
중흥(中興)531년~532년 |
- |
- |
무목황제 |
원회(元懷) |
- |
제14대 |
- |
효무황제 |
원수(元脩) |
태창(太昌)532년 |
동위(東魏):534년~550년
대수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제1대 |
효정황제 |
원선견(元善見) |
천평(天平)534년~537년 |
534년~550년 |
서위(西魏):534년~556년
대수 |
시호 |
성명 |
연호 |
재위기간 |
- |
문경황제 |
원유(元愉) |
- |
- |
제1대 |
문황제 |
원보거(元寶炬) |
대통(大統)535년~551년 |
535년~551년 |
제2대 |
폐황제 |
원흠(元欽) |
- |
551년~554년 |
제3대 |
공황제 |
탁발곽(拓跋廓) |
- |
554년~556년 |
◆ 신라시대 원씨 |
족보를 초간본을 만드신 에조판서 창하공 (휘,경하:景夏)께서는 우리원씨는 신라에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하여 놓으셨다. 하여 삼국사기,삼국유사 의 인물편에 원씨로 기록된 이름을 그대로 옴겨 정리하였다.
원태(元泰) : 686년 신라 신문왕, 관직 : 아찬, 3월에 <서원소경>을 설치하 고 아찬 원태를 사신으로 삼았다.
원사(元師) : 688년 신문왕, 관직 : 중시, 8년 봄 정원에 중시 대장이 죽고 元師) 가 중시가 되었다. 2월에 선부에 경 한사람 을 증원하였다.
원선(元宣) : 효소왕 원년(692년) 8월에 대아찬으로서 중시가 되었다. 원선은 3년 뒤인 695년에 노환으로 물러났다.
원훈(元訓) : 성덕왕 원년(702년)에 아찬으로서 중시가 되었다.
원문(元文) : 성덕왕 2년(703년) 가을에 관직에서 물러난 중시 원훈 의 후임으로 중시가 되었다. 관등은 아찬. 2년만인 705 년 에 사망.
원흥(元興) : 헌덕왕 3년 (811년) 관등은 이찬이며, 봄 정월에 양종의 후임으로 시중이 됨. 그의 후임은 전임 시중인 김헌창 이 다시 맡았다.
◆통일 신라시대 말기 및 후고구려 원씨 |
삼국사기,삼국유사,궁예열전,고려사에서 통일신라 말기 와 고려 건국전 원씨 인물편을 정리하였다.
원충(元忠) : 919년 관직:시중, 통일신라시대 강릉김씨(시조 김주원) 족보 에 6세 선환(宣喚)의 사위로 등재 문헌발견.
원량검(元良儉) : 949년 원충의 아들 평장사
원회(元會)
889년( 진성여왕 3) 농민들이 전국에서 봉기하였다. 또 봉기는 한 해에 그친 것이 아니라 계속되었다. 혼란이 지속되자 기훤(箕萱)은 죽주(竹州: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를 거점으로 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원회는 그의 휘하에 들어갔다.891년(진성여왕 5) 궁예(弓裔)가 기훤의 부하가 되었는데, 기훤은 궁예를 홀대하였다. 궁예가 이를 걱정하고 불안해하자 원회는 신훤(申煊) 등과 함께 기훤 몰래 궁예와 결탁하여 동지가 되었다. 892년(진성여왕 6) 궁예는 기훤을 떠나 북원(北原: 지금의 강원도 원주)의 반신라적인 세력가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었다. 원회도 궁예와 함께 양길에게 간 것으로 여겨진다. 궁예의 초기 세력에 속하는 인물이나, 상세한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궁예왕 과 철원성전투 와 원주 비뇌성전투에서 양길과 싸우다 전사하여 후고구려(태봉) 건국에 참여치 못하였다.
원종(元宗)
889년(진성여왕 3) 신라의 사벌주(沙伐州 :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에서 원종 · 애노가 일으킨 농민 봉기를 일으켰다.신라는 중대의 전성기를 지나 하대로 접어들면서 정치 · 사회적인 모순이 심화되어 갔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중앙 진골 귀족 간의 잦은 정쟁(政爭)으로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었으며, 관(官)이나 귀족 및 사원의 토지 겸병 확대로 일반 농민들은 점차 토지로부터 유리되어 갔다.
국가 경제의 기반인 농민층이 분해된 반면, 사치와 향락의 풍조로 중앙 정부의 재정 수요는 점점 늘어만 갔다. 진성여왕 대에는 이러한 모순이 극도로 심화되었음에도 근본적인 개혁안을 마련하지 못하였다.889년 지방의 주 · 군에서 세금을 바치지 않아 국고가 텅 비고 재정이 궁핍하게 되자, 중앙 정부는 사자를 파견해 오히려 조세를 독촉하였다. 이러한 조세 부담은 피지배층인 일반 농민에게 그대로 전가되었으며, 이에 저항하는 농민 봉기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대표적인 농민 봉기가 바로 사벌주를 근거로 해 일어난 원종과 애노의 난이다. 중앙 정부는 이 난을 진압하고자 나마(奈麻) 영기(令奇)를 파견했으나 오히려 농민군의 세력에 눌려 공격조차 못하였으며, 촌주(村主) 우련(祐連)이 전사하였다. 이 일로 영기는 처형되었으며, 10세 정도인 우련의 아들이 촌주를 계승하게 되었다. 이 때 반란군이 진압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다른 반란군의 무리나 지방 세력에 의해 흡수, 통합되었거나 또는 거세된 것으로 보인다. 원종은 원주 양길에게 합류하였다고 한다. 이 난은 중앙 정부와 지방 토호 세력에 저항하며 일어난 신라 하대의 농민 봉기로서는 선구자적 의의를 지니며, 이후 지방 세력의 형성과 성장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신라 고대국가를 붕괴시키는 기폭제 구실을 하였다.
원봉(元奉,元逢)
고려 태조에게 귀순하여 순주성 성주를 역임한 호족.922년(태조 5) 6월하지현(下枝縣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면) 장군으로서 고려 태조에게 귀순하였다. 태조는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원윤(元尹) 벼슬을 주고, 하지현을 승격시켜 순주(順州)로 하였다. 929년 고창군(古昌郡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병산(甁山)싸움에서 참패한 후백제왕 견훤(甄萱)이 다음날 군세를 정비하여 전주로 가는 퇴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순주성(順州城)을 공격하자 성주인 그는 이를 방어하지 못하고 패하였다. 견훤은 이 성을 함락시켜 백성을 포로로 하여 전주로 데리고 갔다. 이 때 태조는 고창군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크게 노하고 순주에 행차하여 성을 수축하고, 순주를 하지현으로 강등시켰다. 이 때 그는 옛 공이 참작되어 강등의 처벌만 받았다.
◆고려국(高麗國)의 원주원씨 와 조선시대 원주원씨는 인물이 많아 별도로 정리하여 올리고자한다.
◆근현대사 원주원씨 인물편도 정리 되는대로 올리고자 한다.
Ⅴ. 元 字 바로 읽기 |
1.한자사전
元 [으뜸 원] [부수]儿 (어진사람인발) [총획] 4획
1. 으뜸, 처음, 시초(始初) 2. 우두머리, 두목(頭目), 임금 3. 첫째, 첫째가 되는 해나...
[부수]儿 (어진사람인발) [총획] 4획
• 1. 으뜸, 처음, 시초(始初)
• 2. 우두머리, 두목(頭目), 임금
• 3. 첫째, 첫째가 되는 해나 날
• 4. 기운(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오관(五 官)으로 느껴지는 현상), 천지의 큰 덕, 만물(萬 物)을 육성하는 덕
• 5. 근본(根本), 근원(根源)
• 6. 목, 머리
• 7. 백성(百姓), 인민(人民)
• 8. 정실(正室), 본처(本妻)
• 9. 연호(年號)
• 10. 화폐(貨幣)의 단위(單位)
• 11. 나라의 이름
• 12. 시간(時間)의 단위(單位)
• 13. 크다
• 14. 아름답다, 착하다
자원(字源)
회의문자
元자는 ‘으뜸’이나 ‘시초’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갑골문에 나온 元자를 보면 人(사람 인)자의 머리 부분에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다. 元자는 본래 사람의 머리를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일의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으뜸’이나 ‘시초’, ‘근본’, ‘우두머리’와 같은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몽골의 제5대 황제인 쿠빌라이가 세운 나라 이름도 원(元)이었다. 1279년 남송을 정복하고 중국을 통일한 원나라도 ‘으뜸인 나라’를 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형성 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