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의 황제 원씨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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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석장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05-20 04:48 조회2,23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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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魏 (後魏) (북위 / 후위)
386 ~ 534 선비족(鮮卑族)의 탁발부(拓跋部)가 중국 화북지역에 세운 북조(北朝) 최초의 왕조(386∼534).
원위(元魏)·후위(後魏)라고도 한다. 3세기 중엽 탁발부는 내몽골의 바옌타라[巴彦塔拉] 지방에서 세력을 넓혔으나, 4세기 초 이들의 세력을 이용하여 북변의 보위(保衛)를 도모하려는 서진(西晉)으로부터 산시성[山西省] 북부의 땅을 얻음으로써, 그곳에서 세력을 신장하였다. 315년 군장(君長)인 탁발 의로(拓跋盧)는 서진의 관작을 받고 대왕(代王)으로 봉해졌다.
탁발 십익건(拓跋什翼) 때 전진(前秦)의 부견(符堅)과의 싸움에 패하여 정권이 와해되었지만, 부견이 비수(水)전투에서 패한 기회를 이용하여 탁발 규(拓跋珪:후의 道武帝)는 나라를 재건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위(魏)라고 하였다(386). 이어 내몽골 여러 부족을 평정하고 후연(後燕)을 격파, 허베이[河北] 평야에 진출하여 국도를 평성(平城), 즉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에 정하였다(398).
위는 중국 고래의 전통에 의한 국가 체제를 채용하기로 정하고, 화북지방을 평정하기 위하여 몽골에서 데려온 여러 유목 부족을 해산시켜 부민(部民)을 군현(郡縣)의 호적에 편입하게 하였다. 그리고 훈공이 있는 부족 중의 유력자에게는 관작을 수여하고 한족(漢族)의 명문(吊門)과 똑같이 고급관리로 채용하여 귀족제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명나라 원제(元帝) 때 남조(南朝)의 송(宋)을 공략하여 허난[河南]지방의 땅을 빼앗았고, 태무제(太武帝) 때 하(夏) ·북연(北燕)·북량(北凉)을 멸망시킴으로써 5호 16국(五胡十六國)의 난을 종식시켜, 439년 마침내 북위는 강북지역 통일을 완성하였다. 그뒤 선비족의 한화(漢化)가 촉진되었는데, 특히 효문제(孝文帝)가 즉위하자 국도를 뤄양[洛陽]으로 옮겨(494), 호복(胡朊)·호어(胡語)를 금하고 호성(胡姓)을 한인(漢人)처럼 단성(單姓)으로 고치게 하였으며, 황족인 탁발씨도 원씨(元氏)로 개성(改姓)하였다. 효문제는 한화정책과 함께 봉록제(俸祿制)·삼장제(三長制)·균전법(均田法) 등을 창시하여 북위의 국력과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북방민족 고유의 소박상무(素朴尙武)의 기풍이 쇠퇴하고, 사치스럽고 문약(文弱)한 경향이 일어났다. 그리고 나이 어린 효명제(孝明帝)를 섭정한 영태후(靈太后)가 지나치게 불교를 존숭하여, 사탑(寺塔) 건축에 국비(國費)를 낭비함으로써 국정을 어지럽게 하였다. 따라서 도둑이 들끓고, 524년에는 북진(北鎭) 병사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난을 진압할 때 큰 공을 세운 북방 민족의 무장(武將) 세력이 강력해져, 마침내 그들의 수령 이주영(爾朱榮)이 정권을 전단(專斷)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이주씨(爾朱氏) 일당은 그의 부장(部將)인 고환(高歡)에게 격멸되었다.
그로부터 우문태(宇文泰)와 고환의 대립이 격심해졌으며, 따라서 양자는 각각 북위의 종실을 천자로 옹립하였다. 534년 우문태는 고환의 전횡(專橫)을 증오하여 우문태에게 의지한 효무제(孝武帝)를 살해하고, 이듬해 문제(文帝)를 옹립하여 즉위하게 하였다. 이처럼 북위는 서위(西魏)와 동위(東魏)로 분열되었는데, 동위는 550년 고환의 아들 양(洋)에게 빼앗겨 북제(北齊)가 되었으며, 서위는 556년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宇文覺)에게 빼앗겨 북주(北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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